지난 3월 31일, 시각장애 학생 및 교원의 교과용 도서 지원과 관련된 초·중등교육법 제29조 개정안(의안번호 2217886)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이번 개정이 시각장애인의 교과서 접근권이 지닌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조치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이를 규탄한다.
1. 당사자 단체와의 소통이 배제된 입법 과정의 문제점
본 연합회는 시각장애 학생과 학부모, 시각장애 교원을 포함한 청구인들과 함께 오랜 기간 입법부와 교육부의 제도적 미비 속에서 침해당해 온 교육권을 보호하고자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해당 헌법소원은 ①법령상 점자교과서에 교과서로써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점, ②시각장애 학생에게 학기 시작 전과 같이 기한을 특정하여 교과서를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의무 규정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오랜 기간 누적된 시각장애인들의 고통과 제도 개선 요구가 집약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법 개정 과정에서 당사자 단체와의 충분한 의견 조율이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연합회가 공식적으로 법 개정에 대한 반대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일방적인 개정이 이루어졌다. 헌법소원이 제기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리 구제책 없이 서둘러 진행된 이번 입법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헌법소원에 따른 비판 여론을 경감하려는 미봉책이라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2. 현장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개정 법률의 한계
당사자들과의 충분한 논의가 전제되지 않은 이번 개정안(제29조 4항, 5항 신설)은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첫째, 여전히 점자교과서에 ‘교과서’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번 개정에서도 점자교과서가 일반 교과서의 부차적 자료로 남게 됨에 따라, 검인정 절차에서 점자교과서 제작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일반 교과서 발행이 완료된 시점에서야 점자 변환이 시작되는 종속적인 구조가 유지되는 한, 법률로 학기 전 공급을 의무화하더라도 이는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목표에 불과하다.
둘째, 위반 시 책임이나 제재 규정이 없는 선언적 의무에 불과하다.
개정안은 교육부장관 및 교육감에게 학기 시작 전 보급 의무를 부과하였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의 벌칙이나 제재 조항이 부재하다.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 법적 장치 없이 선언적 규정에만 그친다면,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교과서 보급 지연 사태를 방지할 수 없다.
셋째,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30일 이내 파일 제출’ 규정은 오히려 보급 지연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개정안은 교과서 발행자에게 디지털 파일을 30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현장에서는 교육부 국립특수교육원의 협조 공문만으로도 출판사들이 수일 내에 디지털 파일(PDF)을 신속히 제공하고 있다. 즉, 교과서 보급이 늦어지는 진짜 이유는 파일 제공 시점이 늦어서가 아니라, 제공된 파일이 점자 변환에 부적합한 형태여서 내용 보강과 변환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국민권익위원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바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018년 교육부 국립특수교육원이 제정한 국가 기술표준에 맞추어 출판사가 파일을 제공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제출 기한만 30일로 명시한 것은, 오히려 출판사가 파일 제공을 늦추거나 불가피한 사유를 들어 거부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로 오용될 소지가 있다.
3.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을 위한 촉구
결과적으로 이번 개정은 시각장애 학생 및 교사가 실제로 겪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마치 교과서가 적기에 제공될 수 있을 것 같은 외관만을 형성하였다. 이는 시각장애인의 정당한 권리 구제를 위한 헌법소원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실효적 권리 보장을 지연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장애 학생의 의무교육을 보장하는 우리 법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학습의 기본 수단인 교과서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는 교육권의 심각한 침해이다. 이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국회와 정부에 다음과 같이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을 강력히 촉구한다.
하나. 국회와 정부는 점자교과서에 일반 교과서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즉각 부여하라.
하나. 선언적 규정에서 벗어나 강제력 있는 실효적 법안을 마련하고, 출판사가 국가 기술표준에 맞춘 디지털 파일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시각장애 학생 및 교사가 비장애 학생 및 교사와 동일한 시기에 완전한 형태의 교과용 도서를 제공받아 실질적인 교육권이 보장될 때까지, 현재 진행 중인 헌법소원을 비롯하여 필요한 모든 법적 대응과 제도 개선 요구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
2026년 4월 9일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