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선생님), 꼭 들어 주셔야 할 일이 생겼어예."
10년 전 어느 날, 한 대학원생이 유홍준 명지대 교수(당시 영남대 교수)를 찾아왔다. "대구광역시 시각장애인협회 회장이예, 쌤 모시고 회원들과 문화유산답사를 가고 싶다 하지 않능교. 쌤이 꼭 인솔해주도록 부탁해달라고 했심더." 유 교수 귀가 번쩍 뜨였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들이 답사를 간다고? 며칠 뒤 찾아온 협회장에게 그는 "인솔할 테니 답사 일정은 제게 맡겨달라"며 덜컥 약속해버렸다.
세월이 훌쩍 지난 초가을 주말, 10년 전의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유 교수의 사연을 접한 대구MBC 주선으로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회원 30명과 함께 도동서원~인흥마을 답사를 떠나게 된 것. 17일 아침 일찍 모인 시각장애인들의 손을 하나씩 잡으며 유 교수는 "안녕하세요, 유홍준입니다"하고 체온을 나눴다. 도동서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는 "마음의 빚을 갚게 됐다"며 마이크를 잡았다.
"드디어 여러분과 함께 소풍을 갑니다. 10년 전 회장님과 약속을 했는데 제가 얼마 뒤 대구(영남대)를 떠나게 되면서 답사가 무산됐지요. 오늘은 날씨까지 우리를 도와주네요." 그가 직접 선곡했다는 CD를 틀자 시각장애인 가수 레이 찰스의 노래가 감미롭게 흘렀다. 차창 밖에선 낙동강 물줄기가 그림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대구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을 모신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다. 수령 4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입구에서 일행을 맞았다. "자, 여러분 앞에 늠름한 자태의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 같이 한번 가늠해볼까요?" 유 교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원들이 나무에 달라붙어 두 팔을 벌렸다. 한 명, 두 명, 세 명…. 무려 13명이 양팔을 넓게 벌려 손에 손을 맞잡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교수님, 한 12m 되지 않겠습니껴?" "아니다! 20m는 족히 안 되겠나?" 둘레는 8m였다.
답사는 소리로, 몸으로 이어졌다. 유 교수의 안내에 따라 지팡이를 짚어가며 한 계단씩 오른 이들은 돌담 무늬를 어루만지고 기둥을 안아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원들은 방송국 미술팀이 특별 제작한 도동서원 모형을 만져보며 "아, 여기가 계단이고 이렇게 이어지네"하면서 건물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 ▲ 17일 오후 대구 달성군 남평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에서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회원들이 유홍준 명지대 교수(오른쪽)의 안내에 따라 돌담을 만져보고 있다. /대구=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대청마루에서 유 교수의 미니 강의가 펼쳐졌다. "도동서원은 독특하게도 북향집입니다. 낙동강을 유유히 바라보는 전망을 갖기 위해 북향으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우리 유학자들 고집이 보통 고집입니까? 방향을 반대로 해놓고도 서쪽에 있는 거인재(居仁齋)를 동재, 동쪽에 있는 거의재(居義齋)를 서재라고 했습니다. 보여주는 외관보다 내가 사용하는 내관이 더 중요하다는 뜻, 대단한 고집이지요?"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도동서원 건축의 디테일, 한훤당 김굉필에 대한 강의를 듣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누군가 외쳤다. "야, 우리가 시각장애인이니까 이 호사를 누리지, 휠체어 타는 사람들은 이런 데 못 온다!"
오후에는 인근 화원읍의 남평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을 둘러봤다. 넓은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광거당(廣居堂) 앞에 다다랐다. 유 교수 설명이 이어진다. "솟을대문 안쪽의 헛담에는 깨진 기와조각으로 새긴 꽃 한 송이가 있고, 담 너머로 잘생긴 모과나무 한 그루, 그 너머로 집…. 영상처럼 그려지시나요?" 5살 때 홍역을 앓고 난 후 평생을 암흑 속에 살았다는 홍용점(여·60)씨는 헛담의 꽃무늬를 더듬더듬 만져본 후 "답사라는 걸 처음 와봤는데 교수님 묘사가 워낙 생생해서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답사는 광거당에서 벌어진 작은 음악회로 끝났다. 해금 2중주와 북 반주 판소리를 들으며 회원들은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최종홍(56)씨는 "모처럼 바람도 쐬고 도동서원 은행나무도 몸으로 안아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다"며 "교수님 책을 오디오북으로 듣고 왔는데, 모형을 만져보고 답사를 하니 서원의 큰 구조가 비로소 이해됐다"고 했다.
유홍준 교수는 "앞이 안 보이는 분들은 시각적 이미지를 포기하고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설명할 때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넣듯이 머릿속에 넣는 것을 보고 편견이라는 걸 알았다"며 "시각장애인들이 문화유산을 직접 향유할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