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해설 방송’ 전문작가 1호 서수연씨
에릭: 선배 일은 내일 해도 돼요. 병원에 다시 가야 돼요.
캘리:그래, 그게.
캘리가 에릭에게 안겨서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캘리: 너도 같은 대원이었으니까 직접 해야만 되는 기분을 알 거야. 이상하게도 친했던 애가 죽은 거 같아.
캘리는 패트릭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흑인 소년 패트릭의 시체는 차가운 보관대에 눕혀 있다.〈중략〉 그런 캘리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간다.
캘리: 편히 쉬어.
(미국 드라마‘CSI 마이애미’ 화면해설용 대본 일부)
‘화면해설 방송’ 전문작가 1호로 알려진 서수연(34·사진)씨가 쓴 ‘미국 드라마’ 대본 중 일부다. 드라마나 영화 등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성우가 상세히 설명해 시각장애인들도 마치 눈으로 해당 장면을 보는 것처럼 해주는 것이 화면해설 방송이다. 사례로 든 대본에서 굵은 글씨체 문장이 성우의 내레이션 부분이다. 등장인물의 표정과 동작, 주위 상황까지 그림 그리듯 묘사해야 하므로 대본 작업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2003년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시작으로 9년째 화면해설 방송작가의 길을 걸어온 서씨를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만났다.
“시각장애인은 모든 영상에서 소외돼 있어요. 특히 시각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영화는 화면해설 제작이 거의 드물어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생기발랄 한 얼굴로 “일에 보람을 느낀다”던 그는 장애인들의 시청각 콘텐츠 접근권이 제한된 현실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부 지원과 제도적 기반이 미흡하다 보니 시·청각 장애인들이 양질의 영상물을 편하게 즐기는 데 한계가 많다. 이 탓에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화면해설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손꼽을 정도이고, 지상파 방송의 화면해설 서비스도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 수화와 해설을 동원한 뮤지컬 공연 등 장애인들에게 호평받던 문화사업들이 갑자기 중단되기도 한다.
그는 이런 아쉬움에도 “지금 하는 일은 힘들어도 보람차다”고 했다.
대학 때 문예창작을 전공한 서씨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은 2001년 한 지인의 봉사활동 권유 때문이다. “그 전에는 영상물에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시각장애인들도 영상을 즐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고 한 게 직업이 됐네요.”
대본 작업은 녹록지가 않다. 화면해설용 대본은 70분짜리 드라마를 기준으로 1편 제작에 보통 8∼9시간가량 걸린다. 내용에 따라서는 꼬박 하루가 필요할 때도 있다. “먼저 본 방송을 (시각장애인처럼) 화면 없이 소리만 들어봐요. 그러면서 딸그락 소리는 어디서 나는지, 대사가 안 나올 때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등 장면 하나하나에 궁금한 부분을 점검해요.” 그 다음 방송을 직접 수차례 보면서 등장인물 대사 외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는 대본을 완성한다.
에피소드는 없을까. “같은 장면을 돌려 보면서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공포영화 화면해설을 만들 때가 가장 곤혹스러워요. 그래서 공포영화는 아예 낮에만 만들어요.” 서씨는 수줍게 웃었다. “덕분에 잘 봤다”는 칭찬을 들을 때 가장 힘이 난다는 그에겐 ‘작은 포부’가 하나 있다. “2009년에 영화 ‘아바타’를 보고 시각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받은 그 충격을 시각장애인 분들도 느낄 수 있도록 3D 영상을 화면해설로 풀어보고 싶습니다.”
글=조병욱 기자, 사진=지차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