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볼 권리’ 위해
‘전원일기’부터 1만편 제작
“지상파 예능 등 저변 넓혀야”
» 장현정씨, 서혜정씨, 황덕경씨
화면해설방송 만드는 노원복지관 미디어접근센터
“흠, 다시 할게요.” 내레이션이 쉴틈없이 이어졌다. 성우는 빽빽한 원고에 목이 메어 물을 들이켰다. 그는 인기리에 방영중인 방송 드라마 화면을 따라가며 주인공의 눈빛·걸음걸이·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그림 그리 듯 설명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방송이다.
지상파 방송에서 정식으로 화면해설 방송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장면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영상물에 포함시켜 제작하는 서비스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면해설 방송 전문제작팀을 운영하는 서울시립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노원복지관)은 2002년 <전원일기>를 시작으로 그동안 1만편의 화면해설 방송을 만들었다.
처음엔 황무지였다. 황덕경(42·오른쪽) 노원복지관 미디어접근센터장은 국내에 화면해설 방송 개념이 전무하던 2000년 “구걸하듯이” 방송국과 방송통신위원회을 찾아다녔다. 미국에서 화면해설 방송 제작현장을 견학한 뒤 구성작가 2명을 섭외해 밤낮없이 합숙하며 방송 제작을 공부했다.
“눈을 감고 방송을 모니터해보면 궁금한 것 투성이에요.” 화면해설 방송 제작 10년차인 구성작가 장현정(41·왼쪽)씨는 원고를 쓰기 전에 먼저 눈을 감고 방송을 듣는다고 했다. 딸각거리는 소리는 어디서 나는지, 음악만 흐를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주인공은 왜 흐느끼는지, 모든 상황을 내레이션에 담으려고 애쓴다. 장씨는 “비록 완벽하진 않아도 누구나 공평하게 방송을 감상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엑스파일>의 ‘스컬리 요원’,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로 잘 알려진 성우 서혜정(50·가운데)씨는 시각장애인들의 ‘김태희’다. 그는 2002년 <한국방송> 성우극회와 노원복지관의 자매결연을 계기로 화면해설 방송을 시작한 이후 현장에서 영화·뮤지컬 해설도 하고, 낭독 자원봉사자들도 교육하는 등 노원복지관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엔 에세이집 <속상해 하지 마세요>의 인세로 점자책·오디오북을 제작한 그는 무료로 시각장애인들에게 기증하기도 했다. “무형의 재산을 갖고 있으니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서씨의 눈이 생기있게 빛났다.
“생소했던 화면해설 방송을 보편적 서비스로 자리잡도록 한 점이 가장 큰 성과죠.” 황 센터장은 지상파 방송의 3~4%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편성권을 방송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인기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몇 편뿐이다. “방송사에 더 강력히 요청해,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송을 시각장애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