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정아영(24)씨가 지난달 28일 학사모를 썼다. 정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밝고 어두운 것만 구별할 수 있다. 그는 10세 때부터 찬양사역을 하고 있다.
졸업식에 앞서 정씨를 만났다. 그는 “시각장애인 대학 졸업이 주목받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으로 즐겁게 보내고 있어요.”
미팅도 해봤지만 재미없더라
재학기간은 비장애인과 똑같았다. 그도 5년 만에 졸업했다. 요즘 대학생이 거의 그렇다. 1년은 어학연수를 다녀온다. 정씨는 어학연수를 다녀오진 않았다. 하지만 토플 공부를 위해 1학기 휴학했고, 동아리 활동으로 바빠 또 1학기 휴학했다. 미팅도 했다. “친구들과 미팅 장소에 나가서 짝을 정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며 웃었다.
정씨가 졸업하기까지는 장애인복지시스템의 도움이 컸다. 등·하교는 정부 지원 ‘장애인 도우미’가 함께했다. 비용은 월 10만원 안팎이다. 도우미는 서울 회기역 인근 정씨 집에서 이화여대 강의실까지 안내했다. 물론 정씨 혼자 지하철을 타기도 했다. 친한 친구와 역에서 만나 함께 갈 때도 많았다.
강의시간에는 학교가 마련한 ‘강의도우미’가 도왔다. 강의 도우미는 정씨 옆에 앉아 칠판에 적힌 내용을 설명했다. 또 이를 한글파일로 정리해 메일로 보냈다. 한글파일은 ‘읽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들을 수 있다.
개별 공부할 때도 힘이 됐다. 각종 서적을 타이핑해 한글파일로 만들어주는 ‘입력도우미’가 있기 때문. 한글파일을 받아 컴퓨터로 들으면서 공부했다.
그는 1986년 3월 1.7㎏의 미숙아로 태어났다. 3개월 후 고열에 시달렸고 이때 양쪽 시력을 잃었다. 서울의 큰 병원은 다 갔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10세 때 처음 학교에 갔다. 부산의 맹학교였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2년 만에 4학년으로 월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는 검정고시로 졸업자격을 얻었다.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했던 일반고교에 다녔다. 재수 끝에 2004년 천안의 한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더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삼수를 선택했다. 매일 6시간은 인터넷 동영상을 듣고, 6시간은 책 읽어주는 도우미와 공부했다. 그는 정시모집에서 이화여대 소비자인간발달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인권동아리 회장 맡고 봉사단체 조직하고
정씨는 입학 후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장애인 인권 찾기 운동에 나섰다. 이화여대 인권동아리인 ‘틀린그림찾기’의 회장을 맡았다. 한국점자도서관 이용자위원회 위원, 한국장애인권포럼 장애인학생지원센터 모니터요원으로 활동했다.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한 학생 설문조사도 주도했다. 멘토링 제도, 교재 입력도우미 활성화 등을 학교에 제안했다. “동등한 이화여대 학생으로 대우받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파일로 만들어주는 봉사단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임’도 이끌었다. 졸업 논문은 ‘시각장애인 소비실태에 대한 질적 연구’를 썼다. 음성기능을 추가한 휴대전화 등 각종 제품을 장애인의 시각으로 분석, 개선책을 모색한 것이다.
물론 대학 생활이 쉽지 않았다. 공부할 책은 많았지만 한글파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교재 입력도우미는 3학년 때부터 생겼다. 때로는 그마저 도움이 안 됐다. “교재 입력 도우미가 연락 두절된 적도 있었어요. 시험이 다 끝난 후에 시험 공부할 한글파일을 보내준 도우미도 있었고요.”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도 여전했다. “친구 수진이와 식당 가는데 수진이 친구를 만났어요. 하는 말이 ‘수진아, 봉사활동해?’ 하는 거예요. 시각장애인 안내 봉사하는 줄 안거죠. 제가 항변하듯이 말했어요. ‘우린 친구예요.’”
그래도 친구가 늘 힘이 됐다. 장애를 개성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특히 고마웠다. 사랑 고백을 점자로 하고 싶다는 친구가 그랬다. 장애인인권 향상을 위한 모임에 참가하는 친구도 그랬다. 어느 강의도우미는 3년 동안 수업을 같이 들었다. 도우미로 만나 친구가 됐다.
“동정하거나 장애인 인간승리에 대한 칭찬은 사절이에요. 이런 시선으로는 더불어 살 수 없어요. 장애인도 소소한 행복을 느껴요.”
가족은 항상 든든한 지원군이다. 정씨는 2녀 중 맏딸이다. 아버지 정길순씨는 “언제부터인가 아영이 혼자 다 잘해 걱정할 일이 없다”며 흡족해했다.
삶을 나누는 방송 진행도 하고 싶어
찬양사역은 14년째다. 정씨는 3세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보였다. 찬양을 따라 부르고 장난감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다. “목소리도 타고 났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한 장로가 앨범을 만들자고 했다. 정씨는 10세 때 찬송가 앨범을 냈다. 이어 2002년 서울신대 복음성가경연대회 등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서울강변교회, 육해공군본부교회 등에서 300여 차례 무대에 섰다. 그의 찬양에 감동받고 목회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재학 중에도 주말에는 무대에 섰다. 가장 즐겨 부르는 찬양으로 ‘비아돌로로사’(고난의 길) ‘기름 부으심’ ‘하나님의 은혜’를 꼽았다. 교회는 경기도 분당 주영광교회에 출석한다.
정씨는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전공은 사회학이다. 이후 박사과정에 도전할 계획이다. 유학도 생각 중이다. 찬양사역도 계속한다. “상처받은 이들을 찬양으로 회복시키는 것 역시 주어진 사명”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꿈도 있다. 방송국 MC가 되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방송실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칭찬을 많이 들었다”면서 “삶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출처 : 쿠키뉴스, 2011-03-02,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