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헌] 점자달력부터 AI비서까지…기업들 시각장애인 돕기 새 물결
한화, 점자달력 19년째…삼성전자·LG유플러스는 VR·AI 활용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달라지고 있다. 단기적이고 단순한 금전적 지원 확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소외계층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고민하는 기업이 늘고 있으며, 공헌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도 점자 달력이나 오디오북 제작 같은 전통적인 사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VR(가상현실), AI(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기업도 나타났다.
I. 한화그룹: '사랑의 점자 달력' 19년째 배포
11월 4일은 '점자의 날'이다. 이 날은 1926년 송암 박두성 선생이 일본어 점자를 쓰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해서 발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점자(點字)는 시각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로, 글자를 읽거나 화면을 보지 않고도 정보에 접근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화그룹은 점자의 날 사흘 전인 1일, '2019년 사랑의 점자 달력' 5만 부를 제작해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 점자 달력은 한화그룹 사회봉사단 홈페이지와 한화 점자 달력 사무국을 통해 사전 신청한 300여 개 시각장애인 관련 기관, 단체 및 개인에게 12월 중순까지 순차적으로 전달된다.
'사랑의 점자 달력' 은 2000년 시작되어 올해로 벌써 19년째 이어져 오는 한화그룹의 대표적인 사회공헌 활동이다. 한화그룹이 사회공헌 전담 조직을 본격적으로 갖춘 것이 2002년이고, 좀 더 체계적이고 규모 있는 사회공헌을 위해 사회봉사단을 창단한 것이 2007년이니, 사랑의 점자 달력은 그룹의 가장 오래된 사회공헌 활동의 하나인 셈이다.
누적 72만 부… 쌓으면 에베레스트 높이
한화그룹은 점자 달력 사업을 시작한 첫 해에 5000부를 제작했고, 매년 부수를 늘려 발행 10년째인 2009년부터 벽걸이형과 탁상형 캘린더를 각각 2만 5000부씩 총 5만 부를 제작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한화에 따르면 5만 부는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전국의 시각장애인 절반 이상에게 보급할 수 있는 분량이다. 민‧관을 통틀어 국내 최대 규모다.
사랑의 점자달력 사업은 김승연 한화 회장이 지난 2000년 도움을 요청하는 한 시각장애인의 이메일을 읽고 "시각장애인들도 새해를 맞는 기쁨을 함께할 수 있도록 하자"고 발의한 데서 시작됐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말연시에 새해 달력을 주고받는 즐거움, 새 달력을 열어보며 대략의 1년 계획을 구상하는 설렘을 시각장애인들도 공유할 수 있게 하자는 의미다.
한화 관계자는 "많은 시각장애인이 일정을 수월하게 관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만, 점자 달력은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일정을 스스로 관리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랑의 점자 달력은 시각장애인 관련 단체들의 호응이 높아 매년 부수가 확대됐다"면서 "2019년 달력까지 포함한 누적 발행 부수는 약 72만 부이며, 이를 쌓아 올리면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8848m)와 맞먹는다“고 덧붙였다.
소통 핵심은 ‘점자’…일반달력과 판이한 제작 방식
점자 달력은 일반 달력과 달리 점자 부분이 손상될 위험이 높아, 조판 및 인쇄 작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에 제작된 2019년 점자 달력은 기존에 점자 일부가 유실되어 해독이 어려워지곤 하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종이 재질도 변경했다.
일반 달력과 달리 섬세하고 까다로운 점자 달력 제작의 특성 때문에 한화그룹은 점자 전문 출판·인쇄 사회적 기업인 '도서출판 점자'와 함께 점자 달력을 제작하고 있다. 또 한화는 전문가들의 꼼꼼한 검수를 거칠 뿐 아니라, 실제 사용자인 시각장애인들의 의견도 수렴해서 제작 과정에 반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1~6급 시각장애인 모두가 점자 달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달력의 숫자 크기와 농도 등을 보완하고, 절기와 기념일, 음력 날짜까지 점자로 별도 표기하는 등의 개선은 실제 시각장애인 이용자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김상일 한화커뮤니케이션 부장은 "사랑의 점자 달력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오늘과 내일이라는 의미를 심어줌으로써 인생을 계획할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 주고 있다"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달력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차별 없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II. 삼성전자: 기어VR 활용한 시각보조 앱 '릴루미노' 상용화
삼성전자는 사내 벤처 프로그램인 C랩에서 저시력 시각장애인을 위한 VR 솔루션 '릴루미노'를 개발, 상용화에 성공했다.
'릴루미노'는 전 세계 시각장애인 중 86%는 빛과 어둠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잔존 시력이 남아있는 저시력자라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2016년 6월 시작된 프로젝트다. 삼성전자 C랩 릴루미노 팀을 이끌고 있는 조정훈 크리에이티브 리더(CL)는 "우연히 TV에서 다수의 시각장애인들이 TV 시청을 즐긴다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며 평소 관심도, 사전 정보도 부족했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삼성전자의 기술을 활용한 시각 보조기기 개발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계기를 설명했다.
WHO의 통계에 따르면 세상에는 약 2억 5300만 명의 시각장애인이 있다. 그리고 그중 시력이 아예 없어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전맹(全盲)은 14%인 3600만 명에 불과하며, 나머지 2억 1700만 명의 시각장애인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빛과 형태를 구별할 수 있는 저시력자다. 전맹을 제외한 나머지 1~6급 시각장애인은 시각 보조장비의 도움을 받으면 왜곡되고 뿌옇게 보이던 사물을 좀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
C랩의 릴루미노 팀 관계자에 따르면 기존의 시각보조 장비 중에는 1000만 원이 넘는 것들이 있지만 릴루미노는 일반적인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앱)으로 개발되어, 기어VR 헤드셋에 장착하고 사용하면 되므로 성능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앱과 VR 기기 구매가를 합쳐도 10만 원 안팎이면 장만이 가능하고 휴대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기존 시각보조 장비의 1/100 가격
릴루미노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포착하는 이미지를 시각장애인의 다양한 증상에 맞게 재처리를 거쳐 스마트폰 화면에 보여주고, 기어VR의 접안 장치를 통해 보는 원리를 적용한 앱이다.
예를 들어 시야 전체가 뿌옇게 흐려지고 빛 번짐이 발생하는 각막혼탁 증세가 있는 사람의 경우 릴루미노 앱은 흐린 사물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 보여준다. 망막이 사물의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굴절장애나 고도근시의 경우에는 색 대비나 색 반전, 확대 등의 재처리를 통해 망막이 좀 더 쉽게 초점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다. 중심 시야 또는 주변 시야에 암점(暗點)이 생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암점이 생기는 부분을 지정하면 해당 부분의 이미지를 암점 주변에 복원해 보여준다.
릴루미노 팀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임상실험을 통해 릴루미노의 상용화에 성공했고, 오큘러스 앱스토어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실사용자인 시각장애인들로부터 정확하고 확실한 피드백을 수집했고, 업데이트를 거듭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릴루미노는 지난해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글로벌 이동·정보통신 산업전시회 'MWC(Mobile World Congress) 2017'에 참여해 호평받았고, 지난 9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최대의 광고제 '스파이크스 아시아 2018'(Spikes Asia 2018)에서 이노베이션 부문 금상에 해당하는 이노베이션 스파이크를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릴루미노 팀은 기어VR이 쓰고 외출하기에는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일반 안경과 같은 형태의 글래스 제품을 개발 중이다. 지난 1월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에서 시제품을 선보인 바 있다.
지금까지 릴루미노 앱은 오큘러스 앱스토어에서 1200회 이상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C랩 관계자에 따르면 기어VR 제품 인증을 거쳐야 하고, 시각장애인만 받을 수 있는 앱이기 때문에 이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릴루미노의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한지민과 박형식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단편영화 '두 개의 빛: 릴루미노'를 제작해 지난해 말 온라인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III. LG유플러스: AI 스피커 음성비서와 서비스 보급
첨단 기술이 삶의 전반을 바꾼다는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화두인 시대다. 렌즈가 5개 달린 스마트폰이나 4K~5K 디스플레이, 손끝으로 작동하는 터치패드 등이 일상에 널리 보급되고 있지만, 시각적 인터페이스가 바탕인 이러한 서비스에서 시각장애인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왔다.
단적으로, 요즘 점점 널리 보급되고 있는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기)만 설치된 무인점포에서 시각장애인은 아무 것도 주문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일부 키오스크 스크린에는 '장애인/어린이 전용메뉴보기' 버튼이 있지만 시각장애인은 그 버튼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주로 음성으로 명령하고, 음성으로 피드백을 받는 AI 스피커 음성 비서 플랫폼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더없이 유용한 서비스로 활용될 수 있다. 게다가 AI 스피커 음성 비서는 IoT(사물인터넷) 기술을 통해 그동안 시각장애인 혼자서 제어하기 힘들었던 복잡한 첨단 가전제품들을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LG유플러스는 네이버의 AI 플랫폼인 클로바가 탑재된 AI 스피커와 전용 서비스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일상에 도움이 되는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LG유플러스는 지난 2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시각장애 가정 총 1000가구에 'U+우리집AI' 스피커를 기증했고, 시각장애인 전용 IoT 요금제도 출시하는 등 기존 시각 바탕의 인터페이스 서비스에서 소외됐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서비스의 확대 보급에 나서고 있다.
말로 지시하고 듣는 AI 스피커, 시각장애인에 특히 유용
또한, 지난 9월에는 네이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함께 시각장애인 전용 콘텐츠를 제공하는 AI서비스 '소리세상'을 출시했다.
소리세상은 네이버 AI 플랫폼인 클로바가 탑재된 AI 스피커를 통해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보유한 ▲8개 일간 주요 뉴스 ▲1만 5000여 권의 음성도서 ▲11개 주간/월간 잡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공지 사항 등 시각장애인 전용 콘텐츠를 음성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모든 시각장애인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기존에 시각장애인들이 이 콘텐츠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ARS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적어도 4~5단계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소리세상을 활용하면 "클로바, 소리세상에서 생활경제 들려줘"와 같이 말 한마디로 요청하면 된다.
또한, 네이버 '오디오클립'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2만 6000개 이상의 음성 콘텐츠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기능으로 음성 명령을 통한 IoT 원격제어 기능을 꼽고 있는데, LG유플러스는 이러한 기능을 확대해 AI 스피커와 연동되는 IoT 가전 10종에 선풍기, 세탁기 등을 추가하기도 했다.
LG유플러스 AI 서비스 관계자는 "앞으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지속 선보이는 한편 다른 장애인들을 위한 AI 서비스 개발에도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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