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길 잃은 시각장애인의 하루
시각장애인은 안중에 없는 도시설계…“장애인도 소비자다
유경민 인턴기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6(목) 08:00:00 | 1504호
낯선 땅에 불시착한 이방인 같다. 한국 사회에서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이 혼자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흔한 쇼핑은 물론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날로 발전하는 기술은 비(非)시각장애인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해 줬지만, 시각장애인은 세상과 더 멀어졌다.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일상을 보내는 전맹 시각장애인 박인범씨(남·24)의 하루를 동행해 봤다.
오전 9시50분경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평소 1시간 이상 걸린다는 ‘장애인 콜택시’도 20분 만에 도착했다. 지하철역에 내려서도 별문제가 없었다. 바닥에는 점자블록이 이어져 있었고 역에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이 역내 이동부터 탑승, 하차까지 안내해 줬기 때문이다.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은 “지하철, 여객시설, 공공건물은 지속적인 모니터링으로 접근성이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안한 세계는 지하철역을 나서는 순간 펼쳐졌다.
‘금단의 영역’ 코엑스에서 미아가 되다
“코엑스요? 절대 안 가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혼자 안 가요.”
서울 삼성동 코엑스는 박씨에게 금단(禁斷)의 영역이다. 아니나 다를까, 9호선 봉은사역 7번 출구로 나와 코엑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미아’가 됐다. 오가는 사람들은 성큼성큼 제 갈 길을 갔지만 박씨만은 섣불리 발을 내딛지 못했다.
발밑 바닥이 매끈했다. 시각장애인은 바닥에 설치된 점자블록을 통해 방향을 결정한다. 점형블록은 대기지점, 경고, 방향전환 감지를 위해 횡단보도, 계단 앞에 설치된다. 선형블록은 보행방향을 지시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지하철역 내에서는 끊이지 않았던 선형블록이 코엑스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예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그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을 위한 밝은 노란색의 점자블록이 미관을 해쳐 설치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코엑스몰을 운영하는 신세계 관계자는 “법적 규정은 지켰다”고 강조한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주출입구·계단·승강기 등 시각장애인에게 위험한 장소 앞에는 점형블록을 설치하게 돼 있다. 맨바닥을 한참 걸어가니 계단 앞에서 ‘경고’를 표시하는 점형블록 한 줄이 밟혔다. 최소한의 범위다.
박씨는 길을 찾을 때 종종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앱)을 사용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코엑스 내부 지형은 지도 앱에 뜨지 않는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음식점 근처인지, 옷가게 앞인지, 그는 알 수가 없다. 곳곳에 코엑스 내부 지도가 띄워져 있는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가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안내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키오스크에 다가선다. 그러나 여기에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버튼은 없다. 지하철역 교통카드 발매기에 점자와 음성안내 기능이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뭐가 좀 바뀌나요?” 박씨가 스크린 이곳저곳을 터치하며 묻는다. 스크린에 ‘장애인/어린이 전용메뉴보기’ 메뉴가 있었지만, 그는 그 메뉴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결국 그 메뉴를 터치하는 것도 눈이 보이는 이의 몫이다. 눌러도 특별한 변화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안내데스크를 찾았다. 기자가 “시각장애인은 키오스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안내원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 후 “담당자에게 물어보고 연락하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휴무 중이던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 일이 있은 지 3일 뒤다. 2016년 12월부터 스타필드 코엑스몰 운영을 대행하고 있는 신세계의 관계자였다. 이 관계자는 “음성안내는 실질적으로 어렵다. 키오스크의 운영권은 한국종합무역센터와 CJ파워캐스트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시설관리를 한국종합무역센터에 요청하겠지만 받아줄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지난 2016년 제정된 ‘공공 단말기 접근성 보장 가이드라인(KS X 9211)’에는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시각적 콘텐츠는 동등한 청각정보와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지켜지지 않고 있다.
편리한 기술, 불편 넘어 박탈로
시각장애인이 홀로 돌아다닐 수 없다면 지하철 사회복무요원처럼 시각장애인을 안내해 줄 이는 없을까.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시각장애인인데요, 내부에서 안내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서비스는 없습니다. 안내데스크나 보안요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저는 시각장애인이라 혼자서는 그분들을 찾을 수가 없는데요.” “논의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얼마 뒤 다시 전화가 왔다. “복합시설이어서 공용통로는 스타필드가 관리하고 있지 않다. 한국종합무역센터에 관련 내용을 요청했으니, 일주일 내로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기다림의 연속이다. “시각장애인은 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네요.” 박씨가 코엑스의 문을 나서며 말했다. 코엑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난항은 계속된다. 전맹 시각장애인은 주변의 도움 없이 식당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한숨 돌리기 위해 카페에 갔다. 박씨는 카운터에 다가가 “점자 메뉴판이 있느냐”고 묻자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예상대로다. 새삼스레 기대하기엔 그는 시각장애인이 맞닥뜨린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결국 메뉴를 고르기 위해 직원에게 부탁했다.
“시각장애인인데요, 메뉴를 불러주실 수 있나요?”
“커피, 생과일주스, 티가 있어요.”
“생과일주스에는 어떤 종류가 있어요?”
“파인애플, 수박, 토마토, 키워, 청포도, 딸기, 메론, 복숭아, 자몽, 자두, 망고요.”
“파인애플로 할게요.”
주문은 무사히 마쳤지만 직원의 차가운 목소리와 뒤에 서 있는 손님들의 짜증에 눈치가 보인다. 도움을 요청할 직원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에는 ‘무인 주문’이 늘어나는 추세다. 직원 대신 키오스크가 들어서면서다. 키오스크는 패스트푸드점을 시작으로 카페, 분식집 등에 빠르게 확산됐다. 박씨가 다니는 아주대 학생식당에서도 키오스크 주문이 대세가 됐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및 음성안내기술은 탑재돼 있지 않다.
비시각장애인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기술의 발전이 시각장애인에게는 불편을 넘어 박탈로 다가온다. 전자기기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은 스크린리더 기능을 이용해 전자기기를 사용한다. 스크린리더는 텍스트를 음성으로 들려주는 기능이다. 스크린리더를 이용하면 카카오톡 메신저나 지하철 노선도, 구글 지도 앱 등을 쓸 때 무리가 없다. 그러나 몇몇 앱은 여전히 이용하기 힘들다. 개발 단계에서 시각장애인을 사용자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앱은 스크린리더로 읽었을 때 “버튼” “버튼” “버튼”하는 소리만 들린다.
사진이나 영상 콘텐츠도 그렇다. 대표적으로 카드뉴스가 있다. 시각장애인의 키오스크 접근성 보장 문제를 다룬 ‘스브스뉴스’의 카드뉴스도 정작 시각장애인은 읽을 수 없다. 카드뉴스 중 “음성이 들리지 않아서요. 전혀 사용할 수가 없어서 피해가 되지 않으려 빨리 비켜섰습니다”라는 인터뷰 내용은 파일명으로 읽힐 뿐이다.
“장애인도 소비자” 기업 인식 빨리 바뀌어야
“제가 시각장애인인데요.” 지하철에서, 코엑스에서, 카페에서 박씨가 입이 닳도록 했던 말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은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씨는 장애인이라고 특별대우를 해 주기 바라는 게 아니다. 그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만을 바란다. 제품 디자인 단계에서 ‘신체 한 부분이 불편한 사람이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만이라도 던져봤으면 좋겠다”고 토로한다.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 보장을 위한 움직임은 있다. 지난해 4월3일에는 안전상비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약사법 개정안)이 윤소하 정의당 의원에 의해 발의됐다. 올 2월9일에는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키오스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 통과 여부는 미지수다.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은 “약사법 개정안 등 법안 발의는 19대 국회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법안은 계류하다 국회가 끝나니 폐기됐다”며 “법안 제정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시혜적 입장에서 장애인에게 무언가를 해 준다는 생각이 아니라 장애인을 소비자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