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초, 제생원 맹아부는 어떻게 설립됐을까요?
이번 흰 지팡이 발자취에서는 시각장애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생원 맹아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제생원 맹아부가 생기기 전에도 평양에 맹아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으나 평양맹아학교에서는 여성시각장애인만
학생으로 받아 교육을 했습니다. 또한 학교의 위치가 우리나라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평양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제생원 맹아부가 서울에 관립으로 설립된 것은 우리나라 시각장애교육의 발전에 중요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제생원 맹아부는 설립 당시부터 안마술, 침술, 구술을 시각장애인의 직업교육으로 채택했습니다.
이에 제생원 맹아부를 졸업한 시각장애인들은 침사, 구사, 안마사로 취업하거나 자영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생원 맹아부는 어떠한 계기로 설립된 것일까요?
제생원이 설립되기 전 우리나라에는 많은 민간 사회사업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880년 프랑스인 장블랑 신부가 양로원, 고아원을 처음으로 개설했으며 1906년에는 유길준, 이우준 등이 고아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민간 사회사업 기관들이 일제의 통치하에 위축되었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여러 가지 계획을 검토하다가 우리나라 고유의 구휼기관이었던 제생원을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설립 당시 제생원은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을 위한 맹아부, 고아를 위한 양육부, 정신병 환자를 위한 의료부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시각장애학생을 모집했는데 당시 시각장애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장애가 있는 자녀를
부끄러워하고 외출을 금지하거나 취학을 기피하는 등 제생원의 설립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행정조직을 이용하여 시각장애가정에 직접 찾아가 시각장애아동의 실태를 조사하고 입학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부모들은 교육을 위해 어린 자녀를 서울까지 보내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 관보,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등에 제생원 맹아부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실었으며 뿐만 아니라 교직원을 시각장애가정에 파견하여 입학을 권유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제생원 맹아부에 지원한 학생의 수가 1913년에는 43명이었고 그 후 지원자가 소폭 감소하다가
1921년에는 63명이 지원했으며 계속 인원이 늘어나다가 1935년에는 100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원한 학생 모두가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요. 제생원장의 입학 허가를 받은 학생만
제생원 맹아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3년 4월 1일 제생원 맹아부의 수업을 시작했고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입학식을 거행했습니다.
이후 1913년 4월 10일에는 제생원관제를 제정 및 공포하였는데, 이전까지 제생원에 속했던 정신병 환자에 관한
사무를 조선총독부 의원에 이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제생원관제 제정 및 공포 이후부터 제생원은 맹아부와
양육부 이원 체제로 구성되었는데요. 또한 제생원 맹아부의 입학자격, 수업연한 등을 규정하여 제생원 맹아부의
교육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한국 시각장애인의 역사 (임안수, 2010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