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선시대에 음악에 재능이 있는 시각장애인들은 궁중 음악인으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은 악학을 발전시키면서 관현맹인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요. 관현맹인은 궁중 내연에서 퉁소, 피리, 거문고, 가야금으로 관현합주 또는 가무반주를 했던 시각장애음악인 조직입니다.
세종 13년에 박연은 “시각장애인은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잘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며 장애인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관현맹인은 앞서 살펴본 대로 세종대왕이 조직하였으나 관현맹인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세종 6년에 박연을 비롯한 시각장애인 26명이 “시각장애인들이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으로 직업을 삼아 생계를 이어 왔는데, 요새 국상으로 인하여 음악을 정지하여 살아가기 어렵다.”라고 문서를 올린 것으로 보아 세종 6년 이전에 이미 관현맹인이 조직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음악인들을 궁중에 두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각장애인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복지대책의 일환입니다. 직업을 갖기 어려웠던 시각장애인을 배려하여 관현맹인을 만든 것이죠. 두 번째는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성입니다. 당시 여성만 있던 궁중 내연의 경우에는 비시각장애인 악공들이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음악인으로 구성된 관현맹인이 궁중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관현맹인이 조직되어 존속되는 동안 관현맹인을 두고 줄곧 논란이 있었습니다. 세종 29년에 의정부에 속한 창기들이 모두 향악과 당악을 배워서 관현맹인이 소용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현맹인에 속한 시각장애인들이 관적에 매여 있어서 편하게 살수 없다고 하여 관현맹인을 없앤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주목할 것은 관현맹인으로 있었기 때문에 생업을 위한 음악활동을 하기 어려웠으므로, 관현맹인을 없애서 시각장애음악인들이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시각장애음악인들은 관현맹인 조직이 사라졌지만 사대부들의 잔치나 행사에 가서 음악을 연주하고 대가를 받아 생활한 것이죠. 하지만 이후 성종대왕에 이르러 관현맹인은 다시 부활됩니다. 성종대왕은 관현맹인을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을 선발하여 음악을 교육시켰습니다. 특히 성종대왕은 예조에 명하여 “내연 때는 악공을 쓰지 말고 시각장애인으로 주악을 연주하게 하라”고 말한 것이 전해집니다.